우희열
우희열(禹希烈, 1354년[1] ~ 1420년 12월 6일)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우복생(禹福生)의 차남이자 우예손(禹禮孫)의 조부이다.
생애
편집조선 건국 이전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태종조에 호조전서(戶曹典書), 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를 거쳤으며, 1408년(태종 8) 민무구(閔無咎) 사건에 연루되어 전옥서(典獄署)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이듬해 글을 올려 제언(堤堰)을 수축(修築)할 것을 청했으며, 1413년(태종 13) 충청도도체찰사(忠淸道都體察使)로 임명되어 순제(蓴堤)의 역사를 감독했다.
1415년(태종 15) 3월 다시 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나갔으며, 7월 새 충청도도관찰사로 임명된 황자후(黃子厚)를 대신해 유임되었다.
12월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1417년(태종 17)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를 거쳐 이듬해 판청주목사(判淸州牧事)에 이르렀다.[2]
평가
편집재임했던 곳마다 농상(農桑)과 수리(水利) 분야에서 치적이 있었으며, 사후인 1444년(세종 26) 세종(世宗)은 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 | 우희열은 비록 특이한 재주는 없었으나, 그 성품이 순직(純直)했으므로, 태종(太宗)께서 그를 신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