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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대군

조선 태조의 왕자

무안대군 방번(撫安大君 芳蕃, 1381년 ~ 1398년 10월 14일(음력 8월 26일))은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복 형인 정안대군 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무안대군
撫安大君
조선 태조의 왕자
이름
이방번(李芳蕃)
시호 장혜(章惠)
작호 추성공(楸城公)
군호 무안군(撫安君) · 공순군(恭順君)
신상정보
출생일 1381년
출생지 고려 개경
사망일 1398년 10월 14일 (양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부친 조선 태조
모친 신덕왕후 강씨
배우자 삼한국대부인 개성 왕씨
자녀 풍안군 이효손 (양자)[1]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작위추성공(楸城公)·무안군(撫安君), 시호는 장혜공(章惠公)·공순군(恭順君)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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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번은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왕자로 태조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소생으로 출생했으며, 1387년 어린 나이 시절 귀의군(정양군) 왕우의 딸과 결혼에 이어[2] 1390년 처숙부 고려 공양왕(高麗 恭讓王)의 치세 시기에 아버지 이성계의 지원에 의해 고려 왕조로부터 고공좌랑의 직위를 받았으며, 1392년(조선 태조 1) 7월 조선 개국 후에는 무안군에 책봉되어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다.

태조 2년(1393)에 13세의 나이로 좌군절제사로 임명되었으며 한때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중전 강씨의 추천으로 세자로써 내정되기도 했으나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 중신들은 그를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라고 반대하여 동복 아우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그리고 무안군에 봉작되었다.

태조 7년(1398)에 이복 형 이방원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이 방번에게도 난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으나 방번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등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이후 난이 끝나자 성문 밖으로 쫓겨났고, 중도에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에 안장되었고, 바로 추성공(楸城公)의 작위에 추증되었다. 태종 즉위후 그의 억울한 죽음에 휼전(恤典, 구제지원금)이 추거(追擧)되고 공순군의 시호를 추증하였으며, 훗날 세종 19년(1437) 세종의 5왕자 광평대군이 그의 후사로 정해졌다. 1680년(숙종 6) 대군의 작위를 추증받았다.[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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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대군이 등장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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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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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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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복 숙부 의안대군 이화의 손자이며 생부는 사촌 형 영천군 이담(寧川君 李湛).
  2. 이방번 공이 원주 변씨 시조 변안렬의 사위라는 사실이 원주 원씨와 원주 변씨 족보에 기재되어 있는데 조선초 왕우 집안과 변안렬 집안의 사회적 신분으로 보아 사학자들은 왕우의 딸을 두 번째 부인(당시에는 측실이나 후처, 첩의 개념없이 모두 정실이다.)으로 정리하고 있다.
  3. 조선 초 개성 왕씨들을 멸족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방번의 장인이 된 왕우만은 선조의 제사를 지내도록 살려두었음이 실록에 나와 있다.
  4. *경녕옹주(? - 1449년 음력 7월 19일/양력 8월 7일), 귀의군 왕우(歸義君 王瑀)의 딸
  5. 생애 편의 각주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