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대한민국의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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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金賢植, 1958년 2월 18일 ~ 1990년 11월 1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였다.
- 대표곡으로 〈비처럼 음악처럼〉, 〈내사랑 내곁에〉, 〈추억 만들기〉, 〈사랑했어요〉 등이 있다.
-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가수이다.
- 1990년 11월 1일 간경변으로 32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 전멸 받고 사망하고 말았다.
김현식 金賢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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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1958년 2월 18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
사망 | 1990년 11월 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맨션[1] | (32세)
성별 | 남성 |
직업 | 싱어송라이터 |
장르 | 록 음악, 팝 음악, 블루스 록 |
활동 시기 | 1980년 ~ 1990년 |
악기 | 기타, 하모니카 |
학력 | 명지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
배우자 | 김경자(이전 배우자, 이혼) |
가족 | 김종춘(아버지,1921년 ~ 1969년) 류진희(어머니) 김혜령(누나) 김현수(동생) 김완제(아들) |
생애
편집유년기
편집- 1958년 2월 18일 서울 중구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외가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 1964년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1965년) 옥천 죽향초등학교로 전학, 3학년 때인 1966년에 서울에 있는 서울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 당시 전인권이 같은 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
-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인 1968년에 서울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 1969년, 아버지가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나 어머니 류진희는 홀로 누나 김혜령과 남동생 김현수를 키우며 해본 게 많을 정도로 억척스레 살아야 했다.
-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였으며 1970년에 전교 4등으로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 중학교 재학 시절에 기타를 처음으로 접하였으며, 아이스하키부에서도 활동하여 중학교 초반에 상위권을 유지하였던 그의 성적이 하락하였다.
- 이후 김현식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72년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하여 책을 다시 잡았다.
- 당시 명문 고등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고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밴드부에 들어갔으나 선배들 몰래 트럼펫을 불다 주먹다짐을 벌인 후 밴드부에서 탈퇴당하여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제출하였다.[2]
가수 활동
편집- 자퇴 후 종로의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여 다녔고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 그러나 그 후로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으며, 방황을 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 그러다가 가수 이장희의 동생인 이승희와 한 호텔의 나이트 클럽에서 스타 가수들의 무대 사이를 잇는 들러리 역할로 듀엣 활동을 하였으며, 이승희와 결별한 후에는 김동환과 작약도에서 지옥훈련을 감행한 후 듀엣으로 활동하였다.
가수 데뷔
편집- 1976년에 이장희의 주선으로 음반 제작에 들어갔다.
- 그러나 1978년에 녹음 작업이 끝나고 음반이 나오기 기다리던 중 이장희가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 매료되어 장기 체류를 하고 김현식이 대마초 사건까지 연루되어 정식 데뷔를 하지 못게 되었다.
- 그러다가 2년 후인 1980년에 서라벌레코드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타이틀곡으로 한 1집 앨범을 발표하였는데, 그 때는 그의 음악적 노선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 이 앨범에서 그는 맑은 미성을 바탕으로 소울 록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선보였다.
- 1981년 KBS 방송상대상 첫 출연 하였다.
- 1981년 KBS 방송상대상 첫 출연 하여 동료 가수들인 이용, 민해경, 방미, 이정희, 전영록, 조용필등과 함께 인기가 많았다.
- 1980년대 초반 1982년 초반 KBS 10대가요제 출연 하여 동료들인 이용, 민해경, 방미, 이정희, 전영록, 조용필등과 인기가 많았다.
- 1980년대 초반 1982년에 결혼하여 그 해 12월에 아들 김완제(트래비스 킴)를 얻게 된다.[3]
-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공무원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인근에 피자가게까지 열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결혼이 가져다준 행복에 빠져 있었다.
- 그러다가 1년 후인 1980년대 1983년에 가게를 접고, 세종호텔 나이트클럽에 나가면서 밤무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 후에 크라운호텔과 하얏트 호텔에서도 활동하였다.
- 1980년대 1983년 KBS 10대가요제 출연 하여 동료들인 이용과 정수라과 민해경과 방미과 전영록과 조용필들과 인기가 많았다.
2집 앨범
편집- 1984년에는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동아기획에 스카우트되어 그 해 10월에 '사랑했어요'를 타이틀곡으로 한 2집 앨범을 녹음하여 발표하였다.
- 노래가 발표되자 방송보다는 음악다방, 나이트클럽 등 다운타운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 2집 활동 때까지는 주로 밤무대에서 공연을 많이 하였다.
- 전인권과 함께 한 그룹 '검은 나비'의 리드 싱어 및 조원익이 리드하던 그룹 '동방의 빛', 정성조의 '메신저스'에 들어가 밤무대 최고의 가수로 부각되었다.
- 1980년대 1984년 KBS 10대가요제 출연 하여 동료들인 이용과 정수라과 이선희과 민해경과 방미과 전영록과 조용필들과 인기가 많았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결성, 그리고 본격적인 콘서트 활동
편집- 1985년에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유재하와 함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였으며 이들의 연주로 3집 앨범을 녹음하였다. 그러다가 녹음 후에 유재하가 탈퇴하고 장기호의 소개로 박성식이 들어왔으며, 1986년에 '비처럼 음악처럼'을 타이틀로 한 3집 앨범을 발표하였다.
- 이 음반은 30만 장 이상 팔려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계산된 기획에 의해 움직이는 방송의 속성에 거부감을 느껴 방송 출연을 자제하였기 때문에 '얼굴 없는 가수'로 통하였다.
- 3집 앨범 발표 이후에는 라이브 극장 등에서 공연 활동을 주로 하였으며, 이정선, 엄인호 등을 만나면서 블루스로 음악적 색깔을 그려내기 시작하였다.
시련과 재기
편집- 1987년 11월에 밴드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대마초,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상용 관련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 그리고 사죄의 의미로 3개월 후인 1988년 2월에 삭발을 한 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63빌딩에서 재기 콘서트를 열었다.
4집 활동 및 신촌 블루스
편집- 1988년 9월에 '언제나 그대 내곁에'를 타이틀로 한 4집 앨범을 발매하였고, 같은 해 말에는 음반 판매량이 가장 큰 음반을 발표한 가수에게 수여되는 제 3회 일간스포츠 골든 디스크상을 수상하였다.
- 1989년에는 신촌블루스 2집 앨범에도 참여하여 '골목길' 등을 녹음하였으며, 강인원의 주도로 제작한 영화 음악 '비오는 날 수채화'[4]를 녹음하였다.
5집 발표 및 6집 앨범 녹음
편집- 1990년 3월에는 '넋두리'를 타이틀 곡으로 한 5집 앨범을 발표했으며,[5] '이별의 종착역'을 녹음한 신촌블루스 3집 앨범도 동시에 발표되었다.
- 김현식의 5집 마지막에 수록된 '할렐루야'라는 개신교 찬송가 때문에 그를 개신교 신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김현식 본인은 무종교인이었으며 5집에 수록된 해당 곡은 개신교인이었던 그의 前 부인이 김현식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불러주기를 원해서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 재기 콘서트 이후 밤샘 녹음, 폭음, 줄담배 등은 그에게 치명적인 건강 악화를 불러와 병원에 실려 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 건강이 악화된 와중에도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 김명수와 함께 그의 유작 앨범인 6집 녹음에 들어갔으며, '신촌블루스', '비오는 날 수채화' 팀과 전국 각지를 누비며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다.
건강
편집- 1988년 재기 콘서트를 연 이후 김현식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 지난 해인 1987년 전인권, 허성욱 등과 함께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 석방된 이후 금단 현상으로 괴로워했고, 같은 해 11월 1일 김현식이 그토록 아끼던 후배 유재하의 사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유재하가 사망한 이후 김현식은 몇 달을 술에만 매달릴 정도로 슬퍼했고, 간경화 진단을 받은 이후에도 그는 흡연, 음주를 멈추지 않았고 복수가 차올라 고통스러울 때는 소주를 마시며 고통을 달랬다.
- 권인하, 강인원과 함께 부른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 의사는 술을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하며 음주를 멈추고 휴식을 할 것을 권고했으나 김현식은 음악 작업을 위해 병원에서 자주 탈출하여 앨범 녹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망
편집- 결국 그는 1990년 11월 1일, 음주에 의한 간경변으로 자택인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또는 이촌1동) 렉스맨션에서 우리의 곁을 떠났다.
- 그는 죽기 직전, 그 순간까지 내사랑 내곁에, 그대 빈들에라는 노래를 녹음했다.
- 그 노래들은 우리들에게 남긴 엄청난 김현식의 유작이었다.
- 그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누나 김혜령이었다.
- 누나 (김혜령)는 이 사실을 동아기획 사장인 김영에게 전화로 알렸고, 김영 사장은 "그럴 리가 없어! 어제 자기 입으로 직접 내일 녹음 들어간다고 했단 말이야!"라고 답변했다.
- 그 후 바로 누나 (김혜령)가 바로 한영애에게 직접 "갔어요" 라고 말했는데 한영애는 오해를 하고 "스튜디오 왔다 갔다고요?" 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해서 누나(김혜령)가 "아니, 그게 아니라 갔다고요. 저 하늘로.."라고 답변하고 한영애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고 한다.[6]
- 사후 그의 노래인 내사랑 내곁에가 음반 대상에 올랐고,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했다. 그리고 앵콜곡은 김장훈이 부를 예정이었으나 도중에 생방송을 펑크내 장필순이 대신 앵콜을 진행했다.[7]
음반
편집정규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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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앨범 및 비정규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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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앨범 및 헌정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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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편집- 1991년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대상》
가요 프로그램 1위
편집연도 | 수상 내역 (총 6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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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총 3회) | |
1992년 (총 3회) |
각주
편집-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11020020921401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11-02&officeId=00020&pageNo=14&printNo=21287&publishType=00020
- ↑ 박은경 (2006년 11월 1일). “[창간2년 특집]요절한 유재하-김현식, 아직도 당신은!”. 《조이뉴스》.
- ↑ 후에 김완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
- ↑ 강인원, 권인하와 함께 불렀다.
- ↑ 생애 마지막으로 발표한 음반이다.
- ↑ 출처: 김현식 사망 20주년 기념 다큐멘타리
- ↑ 출처: https://youtube.com/hWCDazbDlQs[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장필순 - 내사랑 내곁에 (앵콜) 911207, 골든디스크상 시상식 中 )